혼돈의 시대

  • 한라산의 활동
    한라산의 활동

    잠든 줄만 알았던 한라산이 활동을 시작했다. 한라의 땅 곳곳에서 화산이 분출했다. 화산재가 하늘을 뒤덮었고 용암이 흘러내려 땅에 있는 거의 모든 문명을 파괴했다. 수십 년 동안 이어진 화산활동으로 땅위의 모든 것은 황폐화되었고 살아남은 사람도 극소수에 불과했다.

    소수 종족들 - 낭족, 거인족, 아기장수족들 - 은 모두 전멸했다. 수차례의 전란으로 그 수가 적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을 피해 산속 깊숙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화산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수가 많았던 바당족 마저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수심이 얕은 연안에 사는 바당족은 용암이 바다로 흘러내리면서 삶의 터전을 모두 다 잃어버렸다. 바당족도 모두 멸족됐다고 알려졌는데 생존한 극소수의 바당족이 이어도에서 살고 있다는 얘기도 있다. 인구수가 가장 많았던 인간만이 간신히 그 명맥을 유지했다. 화산의 징후가 포착되면 배를 타고 바다로 피신했기에 그나마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살아남은 수백 명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그들의 모든 삶의 터전은 파괴되었다. 아무것도 없는 척박한 땅에서 그들은 다시 시작해야했다.

    몇 곳을 제외한 모든 도시들은 용암과 화산재로 인해 사라져버렸다. 이 도시들의 공통점은 제법 규모가 큰 항구도시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화산을 피해 바다에 장기간 머물 수 있을 만한 식량과 생필품들이 풍부했기 때문에 소수의 사람이나마 살아남을 수 있었다. 비록 도시는 원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용암에 묻혀버렸지만 재건할 수 있으리라는 의지만은 확고했다.

  • 재건의 시작
    재건의 시작

    화산재와 용암에 의한 피해는 생각보다 심각했고 재건의 환경을 너무나도 가혹했다. 비축했던 식량은 바닥이 났고 용암이 굳어 척박해진 땅에 농사도 지을 수 없어 사람들이 먹을 식량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바다에서 먹을 것을 구해봤지만 모두가 먹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결국 세 곳 만이 재건에 성공했고 나머지는 살아남지 못했다.

    그들은 가장 먼저 농사가 가능한 땅을 찾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화산재를 걷어내 쓸 만한 땅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식수를 얻기 위해 비가 오면 빗물을 받아서 저장해뒀고 피난할 때 탔던 배를 분해해서 작은 낚싯배를 만들고 거주할 집도 지었다. 그리고 다른 곳에 생존자들이 없는지 수색대를 보내기도 했다.

    이렇게 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라산을 기준으로 북쪽과 남쪽, 남서쪽에 생존자의 마을이 하나씩 있었는데 북쪽 마을에는 ‘양을나(良乙那)’, 남쪽 마을에는 ‘고을나(高乙那)’, 남서쪽 마을에는 ‘부을나(夫乙那)’라는 지도자가 있었다. 각각의 마을은 이들의 성을 따서 ‘양주(良州)’, ‘고주(高州)’, ‘부주(夫州)’로 마을이름을 지었다.

    마침내 각 마을의 수색대가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다. 수색대들은 불을 피워서 나는 연기를 이용해 자신의 위치를 알렸는데 바람이 많은 한라의 땅에서는 연기가 높이 솟지 못해 쉽사리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지 못했다. 바람이 잠잠한 날을 골라 연기를 피우며 서로의 위치를 확인했고 날마다 거리를 좁혀갔다. 드디어 세 마을의 수색대가 한 자리에서 만났고 후에 양주에서 마을의 대표들끼리 만나기로 약속하고 해어진다.

  • 삼성혈
    삼성혈

    약속한 날이 오자 마을의 대표들끼리 양주에 모여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 회의를 했다. 우선 일 년에 한 번 정기적인 모임을 갖기로 했고 장소는 마을마다 돌아가면서 하기로 정했다. 위급한 일이 생기면 서로 도와줄 것을 약속했고 앞으로 각 마을의 발전을 위해 협력하기로 결의했다. 서로 다른 세 개의 성씨가 만나 협약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그들이 만난 장소를 ‘삼성혈’이라 명명하고 그 자리에 기념비를 세웠다.

    여러 세대가 지나서 삶은 어느 정도 안정되었고 인구수도 증가하기 시작했다. 살만한 곳을 찾아서 새로운 마을이 생기기도 하고 마을 간의 길을 만들어 교류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첫 세 마을은 점차 도시의 형태를 넘어서 국가의 개념을 갖춰가고 있었다. 먼저 양주를 중심으로 새로 생겨난 마을들이 통합하여 제주(濟州)로 이름을 바꾸고 가장 큰 세력을 이루었다. 이에 다른 두 주도 주변 마을들과 연합하여 세력을 확장했다. 이렇게 서로의 세력이 커짐에 따라 각 주는 협력보다는 견제를 하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없었던 상비군을 만들어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도 했다.

    이렇게 세력이 나눠지고 서로에 대한 견제가 심해지자 주 경계선을 두고 사냥꾼들의 분쟁이 심화됐다. 경계선이 확실하지 않다보니 사냥을 하다가 상대의 영토에 들어가는 일이 빈번해진 것이다. 급기야 사냥감을 두고 서로 간의 유혈사태까지 발생하는 경우도 있었다. 화산 이후에 가까스로 되찾은 안정과 평화가 깨어질 것을 우려한 각 주의 대표들은 주의 경계를 확실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다시 삼성혈에 모여 모두가 납득할만한 경계선을 설정하는 회의를 했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상황이라서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특히 한라산 서쪽 지역에 세 주의 경계선이 맞닿아있어서 이 부근의 경계선 설정에 난항을 겪었다. 결국 동쪽에 미개발 지역이 있기 때문에 제주와 고주가 한 발 양보하기로 해서 부주에게 조금 유리하게 경계선이 설정되었다. 그러나 협상에서 경계선을 조금 더 확장시킨 부주는 이제 다른 주를 침범하지 않는 한 영토를 확장할 수 없게 되었다.

    제주와 고주는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동쪽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확장하는 과정에서 서로 부딪치지 않도록 어느 정도 암묵적인 합의를 하고 본격적으로 탐사를 시작했다. 그동안 영토 확장에 한계가 있는 부주는 해양으로 관심을 돌리고 장거리 항해가 가능한 선박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 증기기관의 도입
    증기기관의 도입

    어느 날 배를 시험 운항하던 도중 표류하는 낯선 배를 만나게 됐다. 언어가 통하지도 않고 눈도 파랗고 머리색이 노란 외국인들을 처음으로 마주하게 됐다. 일단 표류선을 부주의 항구로 이끌고 와서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서로의 언어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이름은 알 수 있었는데 그 중 하멜이란 사람이 이 배의 선장인 것 같았다. 또 배 안에서 여러 가지 낯선 물건들과 무기들을 발견했는데 모두가 낯설고 신기로운 것뿐이었다. 부주의 관리들은 특히 무기에 관심을 보였는데 칼과 활이 전부인줄 알았던 그들에게 총은 완벽에 가까운 무기와 같았다. 그래서 이들은 하멜 일행에게 고국으로 보내줄 테니 총을 제작할 수 있는 기술을 전수해달라는 제안을 한다. 그러나 무기기술자들은 이미 표류 도중에 다 죽었고 남아 있는 사람들은 항해사들뿐이었다. 결국 하멜과 몇몇 사람들을 볼모로 놔둔 채 본국으로 돌아가 기술자들을 데려오기로 했다. 그리고 교역을 원한다는 뜻으로 부주의 특산물과 고급 물품들을 함께 보냈다. 배가 다시 돌아올 동안 억류된 사람들은 언어를 배우고 몇 가지 실용적인 기술들을 가르치며 남아있었다. 부주의 사람들은 이들이 온 나라를 아란타라고 불렀다.

    부주는 이 모든 일들을 기밀로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주에도 이 소식이 전해지게 되었다. 다른 주들은 부주에게 신문물에 대해 공개하라고 압박했고 부주는 마지못해 무기를 제외한 물품들을 보여주었다. 나중에 분쟁이 생겼을 때 자신들이 우위에 점할 수 있게 무기만큼은 절대로 공개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다른 주들이 이를 눈치 채지 못할 리 없었고 부주를 더 압박하기 보다는 첩자를 심어놔서 비밀리에 정보를 캐기로 했다.

    마침내 배가 돌아왔다. 표류했던 배보다 규모가 더 큰 상선이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언어도 통하니 적극적으로 교역을 원한다는 뜻도 내비쳤다. 그와 함께 가져온 것이 있었는데 바로 증기기관이었다. 아직 개발 초기단계여서 문제가 많았던 증기기관을 이곳에서 시험 삼아 사용해보려고 가져온 것이었다. 어느 정도 신문물에 익숙해진 부주의 과학자들은 증기기관의 잠재력을 꿰뚫어보고 단점들을 보완하기 위해 아란타에서 온 과학자들과 함께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서로 간의 언어 소통이 아직은 원활하지 않아 서로 마찰이 많았고 큰 진전 없이 아란타의 과학자들은 본국으로 떠났다. 오히려 이들이 떠나고 난 후 연구에 진척이 있었다. 기본적인 원리를 습득한 부주의 과학자들은 아란타의 과학자들과 다른 시각에서 문제점들을 분석했고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개선된 증기기관을 만들었다. 여전히 부피가 크고 열효율이 많이 떨어졌지만 만족할 만한 결과를 내놓았다.

  • 마찰의 시작
    마찰의 시작

    이런 소식은 첩자들을 통해서 다른 주에도 보고되었고 연구 결과를 얻어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외교적으로도 회유를 시도했고 연구개발의 핵심 인물들을 매수하려고도 했다. 그 결과 제주는 ‘안상’이라는 개발의 핵심적인 역할을 한 과학자를 포섭하는데 성공하였다. 첩자를 통해 부주에서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개발에 많은 압박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안 제주는 더 좋은 환경과 보수를 그에게 제시했고 부담 없는 상황에서 연구에 매진하고 싶었던 그는 자신과 같은 불만을 가지고 있던 과학자과 함께 제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로 인해 부주와 제주의 사이는 크게 악화되었다.

    한편 고주는 외교적인 마찰을 빚지 않기 위해 영토 일부 내주고 기술을 얻어오는 결정을 내렸다. 부주는 이 제안이 그렇게 내키지는 않았지만 관계가 악화된 제주를 같이 압박할 동맹이 필요했기에 수락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주가 제시한 땅보다 더 많은 땅을 요구했고 신기술이 탐났던 고주는 마지못해 타협했다. 그나마 동쪽으로 확장할 땅이 있었기에 그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부주가 더 많은 영토를 요구한 이면에는 그 지역에 증기기관을 움직일 자원이 매장되어있다는 정보 때문이었다.

    이렇게 세 주의 경계선이 다시 정해졌고 각 주마다 증기기관을 바탕으로 빠른 속도의 성장을 하게 되었다. 인구수가 폭증하였고 체계적인 관료조직도 형성되었다. 이제는 도시를 넘어 국가의 모습으로 발전하였다. 이번에도 제주가 가장 먼저 국가를 선포하였고 국호를 ‘탐라’라고 정했다. 그 다음이 부주였고 국호를 ‘대정’으로 했다. 부주에게 영토를 내준 것에 대한 내분 겪고 있었던 고주는 아직 국가의 단계로 나아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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