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왕전기

  • 제1기 생성의 시대
    제1기 생성의 시대

    한라신화전기 제1기는 ‘생성의 시대’라 명명한다. 이 시기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던 ‘무’에서 세상이 창조되는 시기이며, 이에 따라 한라신화전기 전체의 세계를 운용하는 원리가 최초로 발현하던 시대이다.

    태초엔 두 개의 해와 달이 있었다. 심연의 끝을 알 수 없었던 혼돈의 세계엔 오직 두 개의 해와 달이 가진 순양과 순음의 기운만이 가득했다. 이 음양의 기운이 태동하여 최초의 존재를 만들어내는데, 그것이 바로 용들이었다. 두 개의 해로부터 나온 순양의 기운은 화룡을, 두 개의 달로부터 나온 순음의 기운은 수룡을 만들어낸다. 두 개의 해와 하나의 달이 토룡을 만들어내 조화로웠고, 하나의 해와 두 개의 달이 풍룡을 만들어내 시간의 흐름이 생겨났다.

    4마리의 용은 혼돈 속에 얽혀 존재한 최초의 존재이자 이후의 모든 생명과 만물을 만들어낸 매개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래서 용은 자연 그 자체이자 그것의 현신(現神)으로서 '자연신'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피조물들에게 군림하는 신은 아니었다. 용은 종교적 의미에서 '신'이랄 수 없고 다만 최초의 자연으로 함께 공존했는데, 이후 사람들 중에서는 용을 받들어 종교적인 차원에서 신격화하는 무리들도 생겨났다.

    4마리의 용은 각각 독특한 성질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용들의 성정(性情)은 이후 서로간의 갈등을 만들어내는 데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용들이 생겨나고 혼돈의 세상은 큰 변화를 겪게 된다. 두 개씩 있던 해와 달 중 하나의 해와 하나의 달이 충돌한 것이다. 해와 달의 충돌은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만들어내고 이로 인해 질서가 생겨났다. 세상의 만물이 생겨난 것이다. 하늘과 땅이 생겨나고 산과 들, 바다와 천(川)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 안에는 수많은 동물, 식물, 광물과 함께 지능과 의지를 가진 개별 종족들도 있었다. 만물은 점점 진화하여 그 형태와 성질의 비슷한 정도가 유지되면서 각각의 족속을 이루게 되는데, 그 중에서도 지능과 의지를 가진 개별 종족들은 그 진화의 속도가 다른 만물보다도 우월하여 자신들만의 사회를 구성하게 되면서 특정 종족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 물리적 힘이 뛰어났던 거인족이 있었고, 오랜 생명력으로 식물군에서 종족화된 낭족도 있었다. 지능에 있어서 진화가 괄목할 만한 존재로 성장한 것은 인간족과 바당족이었다. 인간족은 주로 뭍에 거주했으며, 바당족은 물 속에서 살았다. 그리고 인간족의 돌연변이로 태어나 스스로의 종족을 이룬 아기장수족도 있었다. 인간족, 바당족, 거인족, 아기장수족, 낭족 이외에도 자신들의 사회를 이룬 또 다른 개별 종족들이 존재하긴 했지만 이들은 널리 알려지진 않았다.

    지능과 의지를 가지고 놀라울 만큼 성장한 이들 종족을 포함하여 세상의 질서를 이룬 후의 모든 만물은 모두 하나와 해와 하나의 달이 충돌한 에너지로부터 형성되었으며, 그렇기에 이들은 모두 하나의 근원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다만 음양에너지의 조화로 만들어진 용들과 충돌로 만들어진 개별 종족들로 구분할 수 있을 따름이다.

    해와 달이 충돌하면서 생겨난 에너지는 만물을 창조하여 세상의 질서를 세우는 엄청난 결과를 낳았지만, 동시에 또 다른 특별한 것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만물을 창조하고 남은 에너지라고 할 수도 있고 다른 표현으로 한다면 모든 균형 잡힌 존재인 세상만물과는 조금 다른 '극단적 에너지'의 형태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해와 달이 충돌하고 세상에 질서가 생긴 이후엔 더 이상 필요가 없는 에너지이자 다른 측면으로 보면 애써 균형을 잡은 세계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는 무서운 힘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4마리의 용은 다른 이들이 감당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갖고 있는 이 극단적 에너지를 모아 4개의 구슬로 만들어 관장하기로 한다. 그것은 각각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생명의 구슬은 세상만물의 생로병사에 관련한 것이었고 예언의 구슬은 시간의 흐름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이었다. 또 행운의 구슬은 축복과 저주의 힘을 포함한 것이었으며 감정의 구슬은 모든 생명의 감정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이었다. 화룡이 생명의 구슬을 관장했으며, 수룡은 예언의 구슬, 토룡은 행운의 구슬, 풍룡이 감정의 구슬을 가지고 그 강대한 힘이 다른 개별 종족들에게 미치지 못하게 관리하였다.
    4마리의 용은 그 모습을 자주 드러내진 않았지만, 세상의 모든 이들은 용들의 존재에 대해 확고히 알고 있었으며 신성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 구슬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구슬의 힘은 너무도 강력하고 위험한 것이었기에 용들은 구슬의 존재와 그 능력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함구했다. 오직 용과 가까이 소통하는 몇몇의 심방들만이 그것에 대해 알고 있을 뿐이었다.

    심방은 자연과 소통하는 능력을 가진 존재이다. 다수의 연구자들에 의하면 모든 존재는 태어날 때부터 심방의 자질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대부분은 그저 평범하게 살아간다고 한다. 다만 어린 시절부터 심방의 자질을 스스로 성장시키거나 다른 심방들에 의해 길러지며 훈련된 이들이 특수한 능력을 보이며 심방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중에는 특정 동식물과 소통할 수 있는 심방도 있었고, 치유능력 등 평범한 이들이 갖지 못한 능력을 가진 심방도 있었다.

    그 중에서는 불, 물, 흙, 바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이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특별히 용의 심방으로 불리며 각각의 용들과 소통이 가능했다. 일반인들이 용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음에도 4마리의 용들이 세상에 평화롭게 공존이 가능했던 데에는 이들 심방의 역할이 기여한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심방들의 역할이 꼭 좋은 결과만을 낳았던 것은 아니었다. 용들 사이의 갈등이 폭발하여 세상을 황폐하게 변하게 한 '용들의 전쟁'에도 역시 심방들이 무관하다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용들의 전쟁이 시작된 원인은 바로 '구슬' 때문이었다. 진화를 거듭하여 강고한 종족을 형성하게 된 개별 종족들은 몇몇 심방들을 통해 구슬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고, 이에 대해 더 큰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지능이 발달하여 세상의 탄생과 원리에 대해 일찍 깨우치게 된 인간들이 그 중심을 이루었다.
    구슬이 가진 힘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알고 싶어 하던 인간들은 화룡과 소통하던 심방 하나를 꼬드겨서 화룡이 가지고 있었던 생명의 구슬을 훔쳐내었다. 구슬은 곧 화룡에게 돌아갔지만, 생명의 구슬이 가진 능력 중 일부가 알려지게 되었고 이를 알게 된 인간들의 욕심은 그 선을 넘어버렸다. 더 많이 알고자 하는 의지는 그것을 갖고자 하는 의지로 점점 커져갔고, 다른 용들이 가진 또 다른 구슬에 대해서도 욕심을 내기에 이르렀다. 개별 종족들의 오만과 만용, 탐욕에 대해 엄청난 분노를 가지게 된 화룡과 상대적으로 개별 종족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풍룡간의 갈등을 시작으로, 토룡과 수룡까지 합세한 용들의 전쟁이 천지를 흔들었다.

    용들의 전쟁은 쉬이 끝날 기미가 없었고, 평화로웠던 녹색의 땅은 용들이 내뿜는 불길과 바람, 흙먼지로 인하여 폐허가 되어갔다. 결국 토룡이 강제로 봉인되면서 화룡과 풍룡은 최후의 일전을 벌이게 되었고, 이로 인해 생명의 구슬이 깨어지게 되는 엄청난 결과에 이르게 된다. 풍룡과 화룡이 사라지고, 남아 있던 수룡이 생명의 구슬이 깨어진 곳에 결계를 친 후 스스로 바닷속으로 들어가면서 구슬의 존재 역시 한라의 땅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으며, 낭족의 대부분은 멸족되기에 이르렀다. 많은 종족들이 전쟁의 참화에 불탄 자신들의 문명을 재건하는 데에 오랜 시간을 써야 했고, 무엇보다도 용들이 이 세상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된 것은 가장 큰 비극 중에 하나였다. 그리고 생명의 구슬이 깨어진 자리에서 나타난 서천꽃밭으로 인해 한라의 땅은 더욱 더 큰 비극을 예고해야만 했다.

  • 제2기 갈등의 시대
    제2기 갈등의 시대

    한라신화전기 제2기는 ‘갈등의 시대’라 명명한다.
    이 시기는 용들이 세상에서 종적을 감춘 이후 종족들이 자신의 문명을 재건하고 더욱 발전시킨 종족 융성의 시대이자 동시에 이들 간의 갈등이 폭발하던 때였다.
    각 종족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쌓아 온 자신들의 기술과 과학적 능력, 조직, 사회 기반 등을 전쟁에 쏟아 붓다시피 했으며 길게 지속된 싸움은 종족 간의 증오와 오해의 골을 뚜렷하게 만들었다. 전쟁의 비극에 회의를 느끼게 된 사람들 사이에서 점차 평화를 꿈꾸게 되었으며, 한라의 땅에 평화를 가져다 줄 ‘태평왕’을 기다리게 되었다. 이 시기는 ‘태평왕의 전설’이 만들어지는 시기이다.

    폐허 이후 용들이 봉인되고, 구슬들이 자취를 감추고 난 후 대부분의 종족들은 용들의 싸움으로 황폐해진 자신들의 삶의 기반을 재건하는 데에 힘을 기울였다. 용들이 내뿜었던 화염과 흙먼지 등으로 많은 산이 불타거나 깎여나갔고 심지어 송두리째 사라지기도 했다. 그렇기에 종족 중에서 깊은 지혜를 가진 것으로 널리 알려졌던 낭족의 대부분이 이로 인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낭족은 이제 종족으로서의 명맥을 유지하기 힘들어졌으며 다만 몇몇 개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그 수조차도 제대로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살아남은 낭족의 후예들은 과거를 거울삼아 끈질기게 자신들의 역사를 기억해갔으며 이들은 후일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종족 중에서도 눈부신 발전의 역사를 이룩한 것은 인간족과 바당족이었다. 이들은 지난 시기 이미 다른 종족에 비해 높은 수준이었던 데다 용들의 전쟁이 남긴 메시지를 자신들의 문화 발전에 유리한 측면으로 적용시켰기에 그 발전의 속도가 남달랐다. 인간족과 바당족 모두 초기 계급 사회로 나아가며 분업화가 뚜렷하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의 계급은 계급 간 이동이 비교적 자유로운 형태를 띠었다. 직업이나 역할에 따라 구분이 존재하고 존경을 받았지만 스스로의 능력에 따라 그 위치에 오를 수 있었기에 보다 나중에 나타나는 엄격한 의미의 계급 사회라고 하긴 힘들었다. 지위나 권력이 세습되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고 대부분 자신의 능력으로 그것을 이루어냈다. 각 마을 단위로도 위계질서가 생겨났으며 전체를 아우르는 중앙 관료들도 초기 형태이지만 나타났다. 모든 것을 문서로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게 했고 같은 일을 하는 이들에게도 그 능력에 따라 차등이 생겨났다.

    이전 시기까지 그저 ‘심방’으로 통용되던 이들 중 더욱 그 능력이 뛰어난 자를 지칭하여 ‘대심방’이라 부르게 된 것도 이 시기 인간족의 역사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대심방은 다른 심방들에 비해 더욱 큰 정치적 지위나 권력, 명예를 갖게 되었으며 심지어 다른 심방들을 여럿 거느리며 또 다른 조직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바당족 역시 물 속에서 거주한다는 자신들의 특징을 장점으로 승화시키며 놀라운 발전을 이룩한 동시에 그들의 문화를 외부와 차단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들이 가진 폐쇄성은 스스로 발전하는 데에 집중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동시에 바당족 문화에 대한 신비로움과 공포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며 다른 종족들에게 두려운 존재로 성장했다.

    이에 비해 거인족과 아기장수족은 이들만큼의 문명을 이룩하지는 못했으나 나름대로 자신들의 종족적 특징에 맞는 역사와 문화를 일구어갔다.

    거인족은 주로 산 중턱의 지역에서 거주했는데, 체계적인 위계질서를 가지기보단 몇몇의 리더를 중심으로 모여 사는 무리들의 연합으로서 발전했다. 그리하여 거인들 사이에서의 ‘왕’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간혹 거인 무리들 사이에서의 갈등이 생겨나기도 했지만 큰 싸움으로 나아가진 않았다. 이들은 인간족이나 바당족에 비해 놀라울 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만 다소 지능은 미치지 못하였기에 때때로 인간족이나 바당족에게 이용을 당하기도 했다. 특히 인간족들이 거인들과의 약속을 어기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때문에 인간족에 대한 신뢰가 약해져 이후 갈등관계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아기장수족 역시 인간과의 관계가 애매하게 형성되었는데, 이는 종족 본연의 시초가 인간족의 돌연변이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남다른 출생으로 아기 때에 인간족에게 버림을 받은 초기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에 인간족에 대한 아기장수족의 감정은 애증적일 수밖에 없었다. 후에 아기장수족 자체적으로 종족을 유지하고 문화를 만들어내던 시기에 이르러서도 인간과의 관계는 항상 논란거리였다. 아기장수족이 스스로의 종족을 이룬 이후에도 인간족 사이에서 아기장수들이 태어나는 일이 간간히 있었는데, 출생하자마자 아기장수족에게 인도하는 인간족-아기장수족 사이의 조약이 오랜 시간동안 계속되어 오면서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시켰다. 간혹 아기장수를 낳은 인간족 부모가 자신의 아이를 내어주지 않고 비밀리에 양육하는 일들이 생겨난 것이다. 이런 경우 인간 사이에서 자란 아기장수들은 그 어떤 종족적 정체성도 갖기 힘들었으며, 이로 인해 어떤 이들은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또 반대로 아기장수족 내부에도 일부 우경화된 흐름이 나타났는데 인간족 출신의 아기장수들을 차별하는 일들도 생겨난 것이다. 그들은 인간족 사이에서 태어나 아기장수족으로 복속된 이들을 따로 ‘놀개기’로 부르며 폄하했고, 이런 차별주의자들은 소수에 불과했지만 특정 시기에 커다란 사회적 문제로 불거지기도 했다. 여하튼 대부분의 아기장수족은 다른 종족에 비해 종족 스스로의 소속감이 매우 높은 이들이었기에 이러한 논란의 불씨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문화를 끊임없이 이어나갔고, 전쟁이 발발했을 때 인간족과의 이러한 이중적 관계가 몇몇 변수를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제2기의 시기 대부분은 사실상 전쟁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데, 갈등의 폭발은 바로 ‘구슬’ 때문에 일어났다. 지난 시기 용들의 전쟁 여파로 깨어진 ‘생명의 구슬’이 그것이다. 생명의 구슬이 깨어진 곳은 그 직후 수룡이 결계를 쳐 놓은 탓에 다른 이들에 닿지 않을 수 있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이 시간동안 종족들은 재건과 발전의 역사를 써 나갔다) 그 곳의 실체가 드러나게 된 것이다.
    생명의 구슬은 본래 해와 달의 극단적 에너지를 담은 구슬 중 하나로 만물의 생로병사를 좌우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이었는데, 그것이 깨어지고 결계로 인하여 그 에너지가 땅으로 스며들면서 그 곳에서는 기기묘묘한 능력들을 가진 식물들이 자라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떤 것은 죽었던 이를 바로 되살릴 수 있는 것인가 하면, 어떤 것은 상대방을 바로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 것이었고 또 다른 것은 온 몸의 피를 거꾸로 돌게 만들거나 피부병을 일으키게도 낫게도 할 수 있는 것 등등 그 능력은 생명의 구슬이 가진 그대로의 힘을 나누어 가진 것이었다. 이곳은 이내 ‘서천꽃밭’으로 불리게 되었다.

    서천꽃밭의 힘은 그 끝을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기에 이를 한라의 땅에 머무는 모든 생명체를 위해 공정하게 사용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각 종족의 대표들이 그 실체가 드러난 서천꽃밭을 나누어 관리하기로 한 초반의 시도가 있었을 때만해도 그곳은 마치 모든 개별 종족들을 위한 선물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욕심은 큰 재앙을 낳았다. 비뚤어진 의지가 오해를 부르게 되고 다시 그 오해가 불신이 되어 종족들은 서로를 믿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다. 그리하여 일어난 것이 ‘서천꽃밭 대전쟁’이었다. 서천꽃밭을 차지하기 위한 그 싸움은 너무도 오래 그리고 참혹하게 계속되었다. 종족 사이의 동맹과 배신이 교차하고 수많은 이들이 전쟁터에서 시체로 널브러졌다. 더 많이 죽인 자가 용사가 되고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게 되는 흉흉한 세상이었다. 애당초 용들에게서 구슬을 요구했던 것은 개별 종족들 스스로에겐 만용이었음이 드러났다. 구슬의 힘은 어느 누구에게도 그 어떤 종족에게도 소유되어서는 안 될 거대하고 위험한 존재였던 것이다. 하지만 종족들은 그것을 깨닫기는커녕 오히려 더 큰 비극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 해도 힘의 균형이 좀처럼 깨어지질 않자, 또 다른 구슬의 존재를 찾기에 이른 것이다. 생명의 구슬은 깨어져 서천꽃밭이 되었지만, 다른 3개의 구슬은 어딘가에 숨어 있을 터... 종족들은 저마다 더 큰 힘을 가지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다. 대심방 모지지가 감정의 구슬을 손에 넣게 된 것이다. 감정의 구슬은 모든 생명체의 감정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을 가진 것이었다. 엄청난 힘을 소유하게 된 모지지 세력은 한라의 땅 전체를 차지하려는 야심을 품고 서서히 그 마각을 드러내게 된다. (이 사실은 은폐되어 있다가 차후 제3기 암흑의 시대에서 표면화된다.)

    전쟁의 소용돌이가 계속되고 많은 이들이 점차 지쳐갈 무렵, 종족을 막론한 곳곳의 지역에서는 꿈같은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다. 하나의 해와 하나의 달이 한 몸을 이루는 날 태어난 아이가 한라의 땅 전체에 평화를 가져다 줄 위대한 자가 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는 종족의 경계를 넘어선 진정한 왕, 즉 ‘태평왕’으로 불리게 될 것이라고들 했다.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를 예언 같기도 풍문 같기도 한 이 이야기는 모든 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동안 전설이 되었고, 전쟁에 지쳐 평화를 기다리는 많은 이들은 이제 하늘을 쳐다보며 해와 달이 언제 하나가 될 것인지를 기다리게 되었다. 그리고 혹자는 전쟁이 너무 길어졌기에 생겨난 꿈결 같은 이야기라고, 그저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을 담은 사람들의 위안거리에 불과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과연 평화의 수호자는 나타날 수 있을 것인가......?

  • 제3기 암흑의 시대
    제3기 암흑의 시대

    한라신화전기 제3기는 ‘암흑의 시대’라 명명한다.
    이 시기는 악의 세력에 의해 한라의 땅 곳곳이 원인 모를 변화가 시작되고, 음모가 현실로 진행되는 시대이다. 동시에 이에 대한 진실을 밝혀 그 욕심을 꺾으려는 평화의 수호자 ‘태평왕’이 탄생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길고 긴 전쟁 끝에 서천꽃밭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고 그곳에 서천꽃밭이 있었던 흔적조차 희미해졌다. 그 때문에 종족들은 더 이상 싸울 이유가 없어지게 되었다. 결국 대전쟁은 한라의 땅을 폐허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상대 종족에 대한 분노까지 남겼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 부었기에 각 종족들의 세력은 많이 약화되었고 수많은 마을들이 잿더미가 되었지만 그래도 재건의 의지를 가지고 하나씩 복구해 나가기 시작했다.

    감정의 구슬을 손에 넣은 대심방 모지지는 이 틈을 타서 세력을 더욱 넓혀 한라의 땅 전체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계획을 차차 실행에 옮긴다. 자신의 수하로 있던 심방 몇몇을 중심으로 권력을 탐하는 이들에겐 권력으로, 재물을 탐하는 이들에겐 재물로 유인하며 그를 추종하는 악의 세력을 충실하게 구축해간다. 또한 서천꽃밭 대전쟁으로 인해 상할 대로 상한 종족 간의 증오와 불신의 관계를 이용하여 욕심 없는 이들조차도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이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핵심은 대심방 모지지의 군대를 만들기 위해 감정의 구슬을 사용한 것이다. 감정의 구슬은 생명체의 감정을 빼앗아 많은 동, 식물은 물론 개별 종족까지도 변화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로 대심방 세력에게 영혼 없이 이용당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대심방 세력이 각 마을을 습격, 마을 구성원들을 끌고 가는 일이 점차 빈번해졌으며 세상은 점차 구슬의 부정적 힘이 뿜어내는 불길한 기운으로 가득해졌다.

    전쟁의 화가 거의 미치지 않았던 어느 한 산골마을에서 태평왕 이야기는 시작된다. 어느날 모지지의 부하가 마을 사람들을 납치해 갔다. 유일하게 남은 것은 노인들과 어린 아이들 뿐. 숲에 있었기에 화를 피하게 된 소년은 마을 사람들을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나게 된다. 마을 어귀에서 찾아낸 엉성한 무기와 촌장 노인에게서 전해들은 적은 정보만을 가진 채 시작된 모험은 처음부터 호락호락하지 않다.
    마을 뒤편 산길로 접어든 소년은 점차 뭔가 모를 음산한 분위기를 느끼게 되고, 곧이어 평소에 보지 못했던 괴물들의 공격에 맞서게 된다. 그들은 분명 숲에 살던 평범한 동식물들이었음에 분명하지만, 어딘가 뒤틀리고 변형된 괴물이 되어 있었다. 그들의 무차별적인 공격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점차 그들을 제압하는 방법에 능숙해지며 소년은 자신의 실력을 키워가게 된다. 그 과정에서 이 사건의 배후에 알 수 없는 악의 세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정체를 파헤치려 한다.
    그리고 어설프게 시작된 이 모험은 점점 더 큰 모험을 부르게 되었고, 모험의 길에서 소년은 태평왕에 대한 전설 또한 알게 된다. 악의 세력의 실체와 구슬을 둘러싼 비밀에 대해 조금씩 조금씩 진실을 밝혀 나가면서 소년은 더 이상 자신의 모험이 단지 마을 사람들을 찾기 위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소년이 악의 세력에 다가가고 있는 중에도 모지지는 자신의 세력을 넓혀 가고 있었고 한라의 땅 절반 이상을 차지하게 된다. 인간족을 중심으로 모지지에 대한 저항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감정의 구슬을 가지고 세력을 확장하는 모지지의 힘을 이겨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수많은 모지지의 수하들을 물리치고 소년은 드디어 대심방 모지지와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는데 자신이 태평왕이라는 것과 모지지가 자신을 이곳에 오도록 계획했다는 것이다. 모지지는 우연히 감정의 구슬을 통해 미래를 보았고 소년이 태평왕이라는 것과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소년이 성장하기 전에 바로 없애버리려 했으나 강력한 힘에 눈이 먼 모지지는 소년이 성장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 힘을 감정의 구슬을 통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계획했다. 그래서 자신의 부하들을 상대하게 하면서 소년을 성장시키고 이곳까지 오게 한 것이다.
    둘 간의 싸움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만큼 치열했다. 모지지의 예상과 달리 태평왕은 훨씬 더 성장해있었던 것이다.

    결국 태평왕이 대심방 모지지를 물리쳤고 풍룡의 유물이었던 감정의 구슬이 깨졌다. 구슬의 지배를 받고 있던 생물들의 세뇌는 풀렸고 구슬에 남아있던 화룡의 기운은 땅 속으로 스며들었다. 감정의 지배가 풀리면서 생명체들을 세뇌하기 위해 쓰였던 막대한 생명력들까지 그 기운에 더해져 엄청난 힘이 한라의 땅 밑에 존재하게 되었다. 그 힘 덕분에 땅에서 자라는 농작물들과 여러 식물들의 성장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모지지의 지배기간동안 흉년만 들었던 것을 보상이라도 하듯이 매해 풍년이었다. 이러한 풍년은 20년 넘게 이어졌는데 그 덕분에 인구수가 폭발적으로 늘었고 사람들의 삶이 윤택해지고 문화도 융성하였다. 그러나 그 힘이 지하 깊숙한 곳에 있는 용암의 활동을 자극하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몰랐다.

    20년간의 풍년의 시대를 바탕으로 한라의 땅은 전에 없던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었다. 이제 곧 닥쳐올 혼돈의 시대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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